상해(上海)는 ‘상하이’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상해요리(上海料理)는 중국의 상하이를 중심으로 특히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등지에서 발달한 요리를 말한다. 일명 호채(滬菜)라고도 한다. 해산물, 양자강의 민물 고기들이 풍부하여, 신선한 게•새우•잉어 등의 요리로, 특히 게와 강새우 회 등이 유명하다. 또한 돼지고기를 진간장으로 양념하여 만드는 홍사오로우(红烧肉)와 바닷게로 만드는 푸룽칭세(芙蓉靑蟹) 등이 유명하다.

상하이는 중국 양쓰 강(the Chang) 하구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중앙 정부 직할시로 되어 있다. 남징조약(南京條約)으로 개항한 역사가 오래된 무역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영•미•일의 공동 조계(租界)와 프랑스 조계가 설치되어 있어서 국제색이 짙은 반식민지 도시였다. 그러나 혁명 후 대공업 도시로 변하여 오늘날에는 중국, 동남아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인 상업도시로 괄목할만하게 발전하였다.

상하이 사변(上海事變)은 1932년, 일본이 군대를 상하이에 상륙시켜 중국군과 충돌한 사건이다. 만주 사변에 대한 세계의 비판의 눈을 돌리게 하고 중국 민중의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탄압할 목적이었으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또 1937년 중일(中日)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이 상하이에 진격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한 사건이다. 전쟁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는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Jiangsu province) 동부에 있는 중국 최대의 도시이다. 양자강(揚子江) 하구(河口)의 남안(南岸), 지류(支流)인 황포강(黃浦江)과 오송강(吳松江)의 합류점(合流點)에 있는 무역항시(貿易港示)로서 중(重)화학공업이 발전한 도시이다. 명칭은 옛날 황포강으로 흐르던 크리크 상해포(上海浦)에서 유래된 것이며 면적은 5,800km2이다.

양자강에 의해 형성된 강남(江南) 삼각주(delta)지대에 있으며, 지형은 낮고 평탄하며 수로(水路)가 종횡(縱橫)으로 만들어져 있다. 연평균 기온은 16도C 이며, 연평균 강우량은 1,100~1,200mm이고, 기후는 온화(溫和)하다.

황포강을 따라 바닷가 상해반도가 행정의 중심부이고, 이와 직교(直交)하는 남경로(南京路)가 상업의 중심부이다. 해방 전에는 이 두 지구(地區)는 외국 자본의 상사(商社)와 은행 등이 집중하여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국영기업체, 행정기관 등이 모여 있으며, 중국 색이 짙은 시가로 변형하였다.

또 대경마장(大競馬場)은 인민광장(人民廣場), 인민공원으로 바뀌어 이곳에서 국경절(國慶節)의 축전(祝典)이 행하여진다. 또 <대세계(大世界)>는 시민의 오락장, 극장으로 바뀌어, 그 옛날 도박(賭博)과 아편(阿片) 등 온갖 악(惡)의 온상(溫床)으로 알려졌던 상해의 면모는 새롭게 변하여 이제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송대(宋代)말인 1267년 상해진(上海鎭)이 설치되면서부터 무역항이 개항되었으나, 명(明)나라시대에서 청대(淸代)에 걸쳐 항해에 관한 각종 금령(禁令)이 생겨서 무역항으로서의 발전은 일시 정체(停滯) 상태에 들어갔다.

17세기에 이르러 금령이 해제됨으로써 재차 항시(港示)로서 활황(活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아편전쟁 결과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구미(歐美)여러 나라에 개항하고 항시(港市)로서 급속한 발전을 했다.

그러나 한편 1845년에 영국, 1848년에 미국, 1849년에 프랑스 등의 조계(租界)가 설치되어 식민지도시의 성격이 짙어졌다. 그 후 소도회(小都會)의 봉기(蜂起), 태평천국의 혁명은 수많은 난민(難民)의 유입(流入)을 초래하여 인구를 격증(激增)시켰으며, 청•일(淸日)전쟁(1894~1895) 후는 외국 자본에 의한 공장이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세계대전 후는 민족자본에 의한 공장이 증가하였으며, 외국자본에 대한 저항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1925년의 중국인 여공(女工)학대사건을 계기로 배외(排外)운동이 격화(激化)되었다. 그러나 1932년 배일(排日)운동 관계로 일본군이 파병(派兵)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상해사변이다.

이어서 제2차 상해사변을 거쳐 제2차대전의 종말(終末)까지 일본군의 점령(占領)이 계속되었다. 1949년 당시 중공군에 의해 점령되어 상해 인민정부가 성립되었으며, 그 후 식민지 색체는 거의 일소(日掃)되었다.

해방 전에는 외국자본과 중국자본 모두가 면방적(綿紡績)을 주로하는 경공업(輕工業)부문으로 규모도 작았으나 해방 후는 공업부문이 현저하게 확충(擴充)되었다. 근래에는 12만톤의 수압(水壓) 프레스기(機)를 가진 대형(大型)기계공장이 건설되는 등 기계•조선(造船)•전기(電機)•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외에 담배와 유리 등의 공업도 활발하다.

공업생산액은 중국 전체의 20%를 차지하여 종합적인 공업기지(工業基地)를 형성하고 있다. 교외(郊外)의 농촌은 물이 풍족하고 크리크(creek)가 종횡으로 발달한 도작(稻作: 벼농사)지대로, 이모작(二毛作)이 성행함과 아울러 면화와 채소 등도 재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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