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복지, 할머니 무릎 교육, 영·유아와 어르신 세대 공감의 장

김미연 영암 이야기 할머니가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영암군 제공
김미연 영암 이야기 할머니가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다./영암군 제공

[서울시티 김정훈 기자]“엄마가 생일날 여러분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뭘까요?” 아이들은 “아○폰15요.” “카×발이요” 대답했다. 영암군 한 어린이집은 이 답변들로 한참 동안 “하하하” 웃음이 넘쳤다.

지난 12일 오후 1시, 영암군 덕진면 월출어린이집 ‘페가수스’반 풍경이다. 7세 아이들 9명이 공부하는 수업이 여느 때와 다른 점은, 그림책 <곰 아저씨에게 물어보렴>을 읽어주는 이가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에 돋보기를 걸치고, 한 손에는 펼친 동화책을 든 이 이야기꾼은, 한복 앞치마를 떠올리게 하는 고운 옷차림에, 가슴에는 ‘무지개’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틈틈이 돋보기 너머로 끊임없이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영암 이야기 할머니’ 김미연(65) 어르신이 읽어주는 그림책에서 닭, 거위, 양 같은 동물이 등장할 때마다, 아이들은 “꼬끼오” “꽥꽥” “음메” 소리를 내며 이야기 구연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림책을 읽어주고 난 김 어르신은,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줬다. “그림책 주인공 ‘대니’처럼, 우리 친구들도 엄마에게 선물을 주면 좋겠어요. 오늘 집에 가면 엄마를 꼭 안아주고, ‘사랑해요’라고 이야기해 보세요.” 아이들은 “네”하고 약속했다.

영암군 덕진면 월출어린이집 7세 아이들의 페가수스반/영암군 제공
영암군 덕진면 월출어린이집 7세 아이들의 페가수스반/영암군 제공

5~6세가 있는 옆 ‘오리온’반에서는 가슴에 ‘해피’ 이름표를 단 장경자(66) 어르신이 수업 중이었다. 새 학기, 새 친구를 맞은 아이들에게 그림책 <친구에게> <친구를 모두 잃어버리는 방법>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두 어르신은 올해 상반기 영암군의 ‘영암 이야기 할머니, 책 읽어 주세요’ 첫 수업으로 이날 월출어린이집을 찾았다. 할머니가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힘이 있었다. 5~7살과 65~66세라는 60년 안팎의 나이 차이, 생전 처음 얼굴을 맞대는 사이의 서먹함은 자리할 틈이 없었다. 할머니가 손주 머리맡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전통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모습이었다.

오리온반 아이들에게 친구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읽어주는 장경자 이야기 할머니/영암군 제공
오리온반 아이들에게 친구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읽어주는 장경자 이야기 할머니/영암군 제공

영암군은 지난해부터 이야기 할머니를 지역 영·유아 교육기관에 파견하고 있다. 어르신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존경 속에 살아가는 ‘생산적 복지’, 영·유아와 어르신 세대가 만나는 ‘세대 공감’, 할머니가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릎 교육’ 등 다양한 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취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달 12일부터 11명의 어르신들이 2인 1조를 기본으로 18개 기관을 4회씩 방문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찾아가는 교육기관은 사전 수요조사를 거쳐 영암군이 선정했다. 하반기인 9~11월에도 같은 규모로 어르신들의 수업은 계속된다.

지난해 5~9월 그림책 구연 전문가에게서 체계적인 정규수업을 받은 어르신들은, 지난달에도 8회에 걸쳐 보수교육을 받았다. 다양한 수업 상황에 대처하고, 아이들의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 위주였다. 7~8월에도 보수교육이 이어진다.

장경자 어르신은 이야기 할머니 모임의 회장도 맡고 있다.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한 그는, 젊은 시절 일 때문에 자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남았단다.

그 아쉬움을 6세 손녀에게 내리사랑으로 전하기 위해 퇴직 후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손녀와 종이접기를 하고 싶어서, 수소문으로 지역에서 색종이 접기 강좌를 찾았다. 어렵사리 초급 공부부터 시작해 사범 자격증까지 땄다. 그러다 지난해 영암군의 이야기 할머니 모집 소식을 접했다.

영암 이야기 할머니 장경자(오른쪽), 김미연(왼쪽) 어르신/영암군 제공
영암 이야기 할머니 장경자(오른쪽), 김미연(왼쪽) 어르신/영암군 제공

장 어르신은 “수업을 받으면 손녀에게 더 책을 잘 읽어줄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서 막연하게 시작했어요. 정규수업에서 그림책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손녀에게 바로 실습으로 써먹었죠. 이제 손녀뿐만 아니라 많은 영암 아이들에게도 책을 읽어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눈높이 수업을 강조하는 장 어르신은, “작년 삼호읍의 한 어린이집에 찾아갔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와락 끌어안아 줬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큰 보람을 느꼈어요”라고 회상했다.

이어 보람과 함께 책임감도 더 커졌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은 잉크 한 방울만 떨쳐도 금방 전체로 퍼지는 컵의 물과 같아서, 좋은 책을 더 많이 읽혀주고,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다 전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손녀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일을 시작한 장경자 어르신은, 영암 이야기 할머니 모임 회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영암 이야기 할머니 프로그램은 이렇듯 장 어르신의 마음을 움직였다. 못다 전한 자식 사랑이 손녀를 거쳐 영암 아이들 전체까지 바라보는 마음으로 커졌다. 이야기 할머니 활동으로 장 어르신은, 한 손녀의 할머니에서 장 어르신은 영암 아이들 모두의 할머니로 거듭난 셈이다.

장 어르신은 “이야기 할머니라는 색다른 경험으로 제가 더 행복해진 것 같아요”라며 ‘해피’라고 적힌 이름표를 차고 다니는 이유를 밝혔다.

영암 이야기 할머니 수업에 쓰인 그림책/영암군 제공
영암 이야기 할머니 수업에 쓰인 그림책/영암군 제공

어린이집도 이야기 할머니가 고맙다. 김은주 페가수스반 담당교사는 “이야기 할머니를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어줄지, 어떤 놀이를 보여줄지 기대하는 아이들도 많다. 구연 방식의 수업이어서 아이들이 더 잘 이해하고 집중도 잘한다”고 말한다.

지난해에 이은 올해 첫 수업을 함께하며 “올해 상반기에 4번 수업한다는데, 수업 횟수를 늘려서 다양한 책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을 아이들에게 더 많이 소개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영암군은 올해 5월 <바위틈 별천지>(가칭) 등 영암의 설화와 역사, 이야기를 담은 책 총 4권을 제작한다. 이야기 할머니들은 하반기부터 이 책들을 들고 아이들과 만날 예정이다. 지역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영암 이야기 할머니가, 영암의 이야기로 영암 아이들과 부대끼며 행복을 나눌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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