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이 집단규범과 다른 관점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집단 구성원들의 관점이나 기대가 서로 달라도 모두 유사하게 행동하는 것을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플로이드 올포트(Floyd Allport)’가 정의했고 ‘집단적 오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원적 무지는 집단 속에서 공적인 행동과 사적인 행동 사이에 틈이 생길 때 발생한다. 집단 내의 규범이 개인이 생각하는 것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라야 할 만큼 강력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규범과 불일치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공개적으로는 지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교 수업을 예를 들어보자, 선생님이 다 알았는지에 묻거나 질문이 없는지 물으면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은 대부분 이해하지 못해 궁금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타인이 손을 들지 않기에 자신만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손을 들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보여 진다.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보편적인 행동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이것을 가이드 라인 삼아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자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타인의 의견을 따르고 비슷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원적 무지를 잘 설명하는 이솝우화가 하나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어느 나라에 허영심 많은 임금님은 거짓말쟁이 재봉사를 만난다. 그는 임금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특별한 옷을 제안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임금님은 솔깃해서 작업실을 내준다. 신하들은 어리석음이 탄로날까 두려워 옷이 보이지 않는데도 거짓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임금은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다. 당신 자신도 어리석음을 들킬까 옷이 보이는 척한다. 사람들 역시 모두 거짓말을 하지만 한 아이가 외친다. ‘임금님이 벌거 벗었다!’고 말이다. 누구도 믿지 않지만 모두 다 남들은 믿을 거라고 믿는 착각이 있다. 아이는 어른들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보이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남들이 ‘아니오’ 할 때 ‘예’ 할 수 있는 용기는 진실을 전달하려는 간절함이기도 하다.

다원적 무지는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1964년 뉴욕.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괴한에게 습격당해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도와 달라고 여러 번 비명을 질렀다. 열 명이나 넘는 사람들이 범행을 목격했지만 구하지 못했다. 다원적 무지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일이다. 열 명 중 한 사람이라도 빠른 신고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녀는 살았을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는 생각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이는 개인이 혼자 있을 때와 집단으로 모여 있을 때 행동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일대일로 만난 선생님의 질문에는 눈치 보지 않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속에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타인에 대한 시선과 남들은 안 하는데 나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가 신고하겠지? 굳이 내가 왜?’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생각, 믿음은 분명히 있다. 그런 생각은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에 동조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때로는 이런 동조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파악한다. 자신의 의견이 소수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집단사고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가지며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원적 무지로 인해 분명 불합리하거나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다원적 무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던지는 의문과 질문들이 용기가 있고 나아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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