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희 심리치료사
김선희 심리치료사

  미국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장교다. 나치 정권이 패망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즉시 체포되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포악한 성격을 가진 악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너무나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고 말한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상부의 명령에 순응하며 악이 자행되었을 때 말하는 개념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라 한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들은 사유할 줄 모르는 무능력자다

아이히만은 상부가 시키는 대로 관리하는 역할을 성실히 이행했고 업무를 잘 처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근면성을 갖고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다했다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반문한다. 자신은 유대인에게 적개심을 품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다. 그는 복종과 순종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비판력 없는 사고를 바탕으로 저지른 행동의 결과는 죄가 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무책임함과 악을 보고 모른 척하는 것이 죄인 거다. 생각하지 않은 복종을 경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이 그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최근 종용한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범죄자들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거나 순진한 총각, 혹은 예의 바른 사람이다. 전혀 저 사람이 악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악이란 특별하고 개념화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 악인이 될 수 있다.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사태도 말이다. 러시아 내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푸틴의 추종자들은 상부의 지시대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나중에 그들도 재판에서 아이히만처럼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그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던 것뿐이다. 나치의 반인륜적인 일들이 지금 다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악마들이 날뛰는 데로 지켜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

누구도 복종할 권리는 없다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권위의 복종에 대해 규명하고 싶었다. 30~40대의 평범한 40명의 남성의 지원 받아 4.5달러를 주고 교사 역할을 준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틀리면 버튼을 누르라고 한다. 버튼에는 전기충격 장치가 연결되어 있고 15V씩 전압이 올라가 450V까지 이를 수 있다. 매번 틀린 답에는 무조건 버튼을 누르라고 한다. 미리 내정된 학생 역할의 배우는 연기를 한다. 실제로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300V 이상이면 위험하며 최고 사망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학생들이 고통스러움을 보이더라고 버튼을 누르는 것을 멈추면 안 된다는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0.1%만 누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40명 중 26명은 450V까지 충격을 주었고 나머지는 멈췄다. 감독자가 시키니깐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이 앞에 있어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복종의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학교 장면에서도 자주 접한다. 실제로 왕따를 시키는 가해자들 중에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사이코패스나 범죄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변에서 보면 그냥 평범함 아이들이다. 피해자가 심한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해도 대수롭지 않다. 그냥 그런 걸로 죽을 줄 몰랐다며 장난이었다고 변명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밀그램의 실험에서 40명 중 14명의 행동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다수의 사람 들이 복종해도 일부의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고 저항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현대사회에서 조직 생활은 살아남기 위해 순응하는 것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도덕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다면 악인이 될 수 있다. 언제든지 거대한 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직에 자신이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행위와 선택에서 어떤 명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양심과 인간성을 갖고 모든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근본 원인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해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을 이루는 이성적 능력의 핵심은 ‘반성적 판단 능력’이라는 것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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