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정회 칼럼리스트

얼마 전 등기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렀다. 빠른 속도로 송수신인의 주소를 치던 여직원이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손길을 멈췄다. 한자로 쓴 성명을 못 읽는 것이었다. 그걸 눈치 챈 나는 그녀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그 한자를 조용히 일러줬다.

그 며칠 후 커피숍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한자가 가득한 옛 신문을 검색해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적혀 있는 쉽지 않은 한자를 다 알고 있었다. 위 두 사례의 주인공 나이는 엇비슷하지만 앞으로 누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어문생활을 하게 될 것인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영어를 모르면 창피해도 한자를 모르는 것은 얼굴 뜨거운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우리말은 70% 이상이 그 뿌리를 한자에 두고 있다. 법학, 경제학 등 전문학술어는 99%가 한자어다. 또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아 한자를 모르고서는 문장의 이해가 제대로 안 된다. 필자가 유학 시절 스페인어를 전공할 때도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필수과목이었다. 현대어의 모체가 되는 고어(古語)를 배움으로써 어원을 알게 되고 나아가 어휘의 확장성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자를 익혀야하는 이유다.

우리가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와의 소통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라 할 수 있다. 한자 교육을 과거지향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현재 영어가 국제 언어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다음으로는 한자중심어가 차지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한자를 알게 되면 중국어는 물론이고 한자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일본어와 함께 베트남어 등 동남아언어권마저 쉽게 습득할 수 있다. 이처럼 일석삼조를 거둘 수 있는 한자가 일부 한글전용론에 밀려 공교육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한자는 배우기에 어려운 문자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알파벳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서양언어를 비롯해 어느 언어에나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은 빨리 읽고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뜻을 알려면 단어 하나하나를 익혀야 한다.

이에 비해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읽고 적기에는 어렵지만 어느 한 자의 뜻을 알면 그와 연관된 많은 단어의 해독이 가능하다.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는 이 둘을 혼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표의문자만을 사용하는 중국에 비해 훨씬 유리한 여건에 있다 하겠다.

한자공부는 인성교육과 직결된다. 예를 들어, 사람으로서 모름지기 해야만 하는 일이 곧 인사(人事)인 것이다. 또 사자성어(四字成語) 한자를 배움으로써 각 고사(故事)에 담긴 옛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 서예를 함으로써 차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미적(美的) 감각을 기르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렇듯 한자를 익힘으로써 우리 삶을 더 폭 넓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이라도 쓰인 한자의 수는 약 5만 개라 한다. 이 중 중국에서는 상용자(常用字) 2,500자, 차상용자(次常用字) 1,000자를 정하여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초등학교 1,006자, 중학교 1,130자를 반드시 익히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문교육용 기초한자로 1,800자를 지정하여 중학교 때부터 선택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영어는 약 2만 개 정도의 단어를 알아야 하는데 한자는 그 1/10인 2천 자 정도만 알면 되니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우리도 지금부터라도 한자를 한글의 일부처럼 생각해 초등학교 때부터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일상에서도 한자를 생활화 할 것을 제안한다. 학생 교복의 명찰을 한자로 쓴다든지, 신문기사의 핵심어를 한자로 표기한다든지, 길 안내표지판과 지명(地名)을 한자로 병기하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직장인이 사용하는 명함에도 영문명은 병기를 해도 99%가 한자어인 우리 이름은 한자를 표기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한글전용론이니 국한문혼용론이니 하는 해묵은 논쟁은 그만 할 때가 됐다.

어떠한 교육이 우리 청소년들로 하여금 경쟁력을 갖추게 해 국제사회의 리더가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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