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대학 동창들과 함께 1박 2일로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니 2시간 40분 만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열차 안에서 TV를 보는데 ‘구가의 서’라는 드라마의 몇 장면이 나왔습니다. 25일 종료된 MBC TV의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 5명 중에서 ‘구가의 서’가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평소 TV드라마를 보지 않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좀 본다는 사람도 뜻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꿰어 맞춰 보았습니다. ‘舊家의 書’, 옛집에 있는 책을 말하나? ‘舊家의 鼠’, 설마 책이 아니라 그 책을 뜯어먹는 쥐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또는 ‘舊家의 西’ 옛집의 서쪽에 무슨 일이 생겼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그런 건가? 아니면 ‘謳歌의 誓’, 행복하고 즐겁게 살자는 맹세, 말하자면 월하의 맹세 같은 그런 거? 에이, 설마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썼겠어?

 그러다가 불현듯 ‘九家의 書’일 수 있겠구나, 뭔가 아홉 개 가문에 얽힌 설화적인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더 이상 갖다 붙일 만한 한자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그 짐작이 맞았습니다. ‘지리산의 수호신 아들인 반인반수 최강치가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무협 활극’이라고 설명돼 있더군요. 포스터에도 ‘九家의 書’라고 조그맣게 한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목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둔해서인지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그런지 아홉 가문의 책, 이게 무슨 뜻인지를 도통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이 드라마를 많이 보는 젊은이들이‘구가의 서’는 물론‘반인반수’라는 말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체로 모르는 말을 만나면 답답하고 약이 올라 이것저것 찾아보고 뒤져보게 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궁금하고 답답한 게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안중근 의사(義士)를 병을 고쳐주는 의사(醫師)로 잘못 알고 있거나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神社)를 신사숙녀라고 할 때의 신사(紳士)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을 동거동락이라고 쓰는 학생들이 하도 많아 새로운 단어가 정착돼 가고 있는 중입니다. 독거(獨居)노인을 독고(獨孤겠지요?)노인이라고 쓴 경우도 봤는데, 이 말의 개념 파악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토기(土器)가 흙으로 빚은 그릇이라는 뜻인 줄 모르고 그냥 무덤에서 나오는 물건이라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1980~90년대의 젊은 기자들도 흔히 최루탄을 최류탄, 한겨레는 한겨례라고 쓰곤 했습니다. 그 무렵 신문사에서 일하던 소년사원 하나가 경향신문 좀 가져오라는 부장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른 기자에게 신문을 들이대며 “아저씨, 이거 경향신문 맞아요?”하고 묻는 걸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호가 ‘京鄕新聞’이라고 한자로 돼 있어 읽지를 못한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젊은이들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들도 모르는 게 많습니다. 젊어서 몰랐던 한자를 나이 들어 갑자기 깨친 건 아니지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일하는 데 필요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어느 보험회사의 회사 설명서에 출재, 수재 이런 말이 나오기에 물어보니 그 뜻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충 얼버무리던 그들은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 한자를 알면 뜻을 알 수 있을 텐데.” 하고 물어도 한자를 대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출재는 出再였습니다. 국내 보험사가 해외의 재보험사에 보험을 들어 계약자-원수사-재보험사의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원수사는 증권에 보험자로 나오는 회사를 말한다는데 아마도 原受社라고 쓰는가 봅니다. 수재는 이와 반대로 국내에서 해외 보험사의 재보를 받는 거라는군요. 즉 受再입니다. 출재와 수재는 한자를 알더라도 무슨 뜻인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도 出財 受財, 이런 게 아닌가 하다가 뜻을 겨우 알게 됐습니다. 설마 범죄 기사에 흔히 등장하는 收財는 아닐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한자를 알면 그 말의 뜻이 분명해지고 이해하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한자교육을 하도 하지 않다 보니 뜻을 모르는 채 앵무새나 원숭이처럼 말만 외우고 따라 읽는 일이 벌어집니다.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는 한자를 알면 제목이 무얼 말하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국어가 아닌 이과 계통의 과목에도 한자를 알면 금방 알 수 있는 용어가 얼마나 많습니까? 실제로 학교에서 배우는 핵심 용어의 90%는 한자어라고 말하는 교사도 있습니다. 순열 조합이나 교집합,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과 같은 말을 이해하는 데도 한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말을 요즘 학생들이 어떻게,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올해 2학기부터 초ㆍ중학교에서 자율적인 한자교육을 시행한다고 합니다. 퇴직 교원이나 한문을 전공한 임용 예정 교원 등이 방과 후 희망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방식입니다. 특히 국어 수학 과학 사회 등 교과서 어휘를 중심으로 한자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삼각형’(三角形), ‘정사각형’(正四角形) 등의 단어가 어떤 의미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지 교육하는 식입니다.

 진작 실시했어야 할 교육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에도 수학이나 과학 시간에 한자로 된 단어의 뜻까지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정확한 한자를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고, 무심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정규 교육을 통해 한자를 가르치는 게 어렵다면 ‘방과후 교육’을 통해서라도 최소한 교과서 이해능력을 높여주고 나아가 세대 간 언어장벽을 덜도록 해야 합니다.

 그 시간에 우리말이나 제대로 가르치지 무슨 한자교육이냐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가능한 한 우리말을 쓰도록 하되 한자어로 된 말을 제대로 알고 쓰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자교육이 필요합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무심하고 무책임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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