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미지와 ‘선정성’ 논란
임권택의 의도 그리고 예술의 자유
[서울시티=김청월 기자] 1984년 6월 10일, 서울 중심가에는 검은 장삼을 입은 1,20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행진을 벌였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구호는 “불교를 모욕하지 마라”였고, 그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태흥영화사가 제작 중이던 영화 <비구니>의 제작 중지였다.
이날은 단순한 문화 검열 논란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종교와 예술, 그리고 여성성과 성적 이미지의 경계가 어떻게 충돌하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문제가 된 영화 <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폐쇄성과 속세와의 갈등, 그리고 비구니라는 존재가 가진 정체성에 접근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공개된 시놉시스와 일부 시사회 자료에서 "비구니가 속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 "비구니의 내면을 성적인 갈등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는 곧바로 불교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영화가 ‘불교를 음란물로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전국의 비구니 승려들이 총집결하는 이례적인 항의 시위를 촉발시킨 것이다.
불교계는 "정화된 수행자들을 성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소비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으며, 일부 종단은 영화 제작 중단을 넘어 태흥영화사의 사과와 임권택 감독의 공개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위는 폭력 없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됐지만, 그 상징성은 언론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한국영화계의 거장이던 임권택 감독은, 영화 <만다라>로 불교의 심오함과 고뇌를 진지하게 다룬 바 있으며, <비구니> 또한 그런 연장선상에서 인간 존재와 금욕, 구원의 주제를 탐색하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속적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인물로서 비구니를 그렸을 뿐, 불교 전체를 모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밝히며,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방식이 종교적 정체성과 신앙의 존엄성을 얼마나 고려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사회의 도덕성과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논란이 이어졌다. 결국 제작사는 비공식적으로 제작을 중단했고, <비구니>라는 제목의 영화는 이후 실제로 개봉되지 못했다.
이번 사건은 단지 한 편의 영화에 대한 항의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해석의 충돌, 그리고 여성 종교인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공론의 장에 올린 계기였다.
또한 이 사건은 당시 군부 권위주의 정권 하의 문화검열과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정부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나, 종교계의 압력이 문화 콘텐츠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영화계와 언론계에 자기 검열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늘날 우리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작품들을 접한다. 그러나 1984년 6월 10일의 그 외침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 ‘종교는 그 어떤 표현도 제약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존중’이라는 윤리는 어디쯤 존재해야 하는가?
영화 <비구니>는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거리로 나섰던 1,200여 명의 비구니들의 외침은, 예술과 종교가 만났을 때 피할 수 없는 윤리적, 문화적 충돌을 한국 사회에 생생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자유로운 예술은 어디까지 가능하며, 신성한 신념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
[영화 비구니]
1984년 초
임권택 감독, 영화 비구니 제작 착수.
제작사: 태흥영화사 / 주제: 비구니의 고뇌와 세속적 갈등
1984년 5월~6월
일부 언론과 종교계 인사들, 영화 내용에 선정성 및 종교 모독 요소 있다고 지적
1984년 6월 10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비구니 1,200여 명, 서울 종로 일대에서 영화 제작 중단 요구 시위 진행
→ 주요 구호: “불교를 모욕하지 마라”, “불교는 음란의 대상이 아니다”
→ 일부 조계종 관계자 및 불교 단체, 태흥영화사에 항의문 발송
1984년 6월 중순
영화계 일각에서 "표현의 자유 침해" 논쟁 제기
감독 임권택, “불교를 왜곡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
1984년 하반기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계 압박에 따라 영화 제작 실질적 중단
비구니는 최종적으로 미완성 상태로 제작 취소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