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사진출처=현대자동차그룹)
미국 조지아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사진출처=현대자동차그룹)

  국내 제조업의 ‘심장’이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반도체부터 배터리, 태양광, 조선, 자동차까지 대한민국 산업을 대표하는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미국행을 택하고 있다. 투자 금액만 약 1,500억 달러(한화 약 200조 원)에 육박한다.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니다. ‘탈한국’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국내에선 규제에 막히고, 트럼프의 압력에 끌려가는 K제조업의 현실이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지금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은 단순한 지사가 아니다. 국가 핵심 산업의 생산 거점을 옮기는, 전략적 중심 이동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약 370억 달러(약 50조 원)를 들여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는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의 수혜를 받기 위한 핵심 투자다.

SK그룹은 반도체 및 배터리 분야에 220억 달러(약 30조 원)를 투자 중이다. 특히 SK온은 포드와 합작해 미시간과 켄터키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LG그룹 역시 배터리와 가전 사업 강화를 위해 200억 달러(약 27조 원) 규모의 투자를 진행 중이다. GM과 함께 오하이오, 테네시에 ‘얼티엄셀즈’ 합작 공장을 건설했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에 전기차 및 배터리 통합 생산기지를 조성하며 210억 달러(약 28조 원) 규모의 투자에 나섰다. 철강 계열사 현대제철도 이에 연계되어 움직이고 있다. 한화그룹은 태양광과 조선 부문에서 22억 달러(약 3조 원)를 투자하며 미국 에너지 공급망 재편에 발맞추고 있다. 이 모든 투자는 2022년 이후 2년 남짓한 기간 안에 집중되었다. 전례 없는 ‘K제조업 대이동’이다.

한국은 왜 외면당하고 있는가. 기업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한국보다 미국이 사업하기 쉽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한국 내에서는 환경·노동 규제, 고비용 구조, 인허가 지연, 에너지 가격 인상 등으로 인해 사업 확장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반면 미국은 반도체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각종 보조금 정책으로 해외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삼성과 SK는 미국 정부와 보조금 협상을 진행 중이며, LG와 현대차는 IRA 세액공제를 발판 삼아 미국 내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귀환 가능성이 이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트럼프는 재선될 경우 ‘미국 내 생산’ 없는 외국 기업에는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을 압박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에게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 공급망'을 통째로 옮긴다. 과거에는 해외 공장이 ‘서브’였다면, 지금의 미국 투자 러시는 본사 전략의 중심축을 옮기는 결정이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와 같은 차세대 산업은 미국 중심으로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다.

SK와 LG, 삼성은 연구개발(R&D) 인력과 고급 엔지니어까지 현지에 배치하고 있고, 현대차는 현지 부품사까지 동반 진출을 추진 중이다. 문제는 이 흐름이 중소 협력업체까지도 미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산업 생태계의 기반이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대기업 중심 공급망이 통째로 이동하면, 국내 일자리, 기술 축적, R&D 기반 모두 약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탈규제, 신속한 결단, 정책 신뢰 회복이다. 정부는 뒤늦게 '리쇼어링'과 국내 투자 유인을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기업들은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입을 모은다.

규제 완화, 산업단지 확충, 세제 인센티브, 인력 양성 등 전방위적 대응이 시급하다.

특히 반도체나 배터리처럼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는, 정부가 '총사령관'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투자처는 자연히 해외로 향할 수밖에 없다.‘경제안보’를 외치는 이 시대에, 제조업의 탈한국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흔들리는 중대한 경고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직시해야 할 때다.

기업은 이윤을 좇는다. 하지만 그 방향이 언제나 ‘한국’을 향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K제조업 대이동은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닌, ‘한국을 떠나는 이유’의 집합체다. 150조 원의 투자 러시가 한국 산업의 위기라는 사실을, 정부와 사회가 얼마나 절실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향후 10년이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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