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그림이 아닌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 회화의 옷을 입고 빛 앞에 서자!
작가 신성희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나라의 존재자가 되게 하였다.”
—신성희, 작가 노트 『평면의 문: 캔버스의 증언』(2005)
“허상의 그림이 아닌 공간의 영역을 소유한 실상으로서 회화의 옷을 입고 빛 앞에 서자!
작가 신성희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나라의 존재자가 되게 하였다.”
—신성희, 작가 노트 『평면의 문: 캔버스의 증언』(2005)
갤러리현대는 신성희(1948–2009)의 개인전 《꾸띠아주, 누아주》를 2월 5일부터 3월 16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작가의 열 번째 개인전이다. 1980년대 초반 김창열(1929–2021) 화백의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던 작가의 작업실 방문을 인연으로 1988년 오광수와 이일(1932–1997)이 에세이를 쓴 도록이 발간되며 갤러리현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80년대 당시 신성희는 한국 미술계에서 찾아볼 수 없던 화려한 색채에 ‘종이 뜯어 부치기’와 ‘뚫린 공간’을 특징을 가진 작업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선보였다. 또한, 갤러리현대는 IMF 외환 위기를 겪던 1998–2000년 파리에서 트럭을 빌려 그의 ‘누아주’ 시리즈 신작 수십 점을 싣고 바젤에서 개최되는 아트 바젤 페어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3년 연속 완판 기록을 세웠고 현재까지 작가는 물론 그 유족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다.
《꾸띠아주, 누아주》는 평면 캔버스 회화의 해체를 통해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서의 다차원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회화를 추구하며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 온 한국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신성희의 작업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전시에는 신성희 작업 세계의 정점인 ‘누아주(엮음 회화)’ 시리즈를 중심으로 10년 주기로 작업 세계에 큰 변화가 있었던 작가의 40여 년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2점이 소개된다. 특히 그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공심(空心)〉 3부작(1971)과 더불어 작가 작업의 절정기인 1990년대부터 작고한 해인 2009년까지의 주요 작업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서 최초 공개된다. 《한국미술대상전》은 1970년에 김환기(1913–1974)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가 대상을 받으며 널리 알려진 공모전이다.
신성희의 회화 세계는 크게 네 시기 ‘마대 회화(극사실 물성 회화)’ 시리즈(1974–1982), ‘콜라주(구조 공간)’ 시리즈(1983–1992), ‘꾸띠아주(박음 회화)’ 시리즈(1993–1997), ‘누아주(엮음 회화)’ 시리즈(1997–2009)로 분류된다. 실제 마대 위에 마대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대 위에 얹힌 물감 덩어리로서의 실상과 마대처럼 보이는 허상을 동시에 지각하게 했던 ‘마대 회화’ 시리즈, 과감한 색으로 채색한 판지를 찢어 콜라주 하며 화면을 직조해 간 ‘콜라주’ 시리즈, 채색한 캔버스를 일정한 크기의 띠로 재단하고 그것을 박음질로 이은 ‘꾸띠아주’ 시리즈, 그리고 잘라낸 캔버스 색 띠를 틀이나 지지체에 묶어 유연한 평면과 기하학적 입체 공간의 통합을 이룬 ‘누아주’ 시리즈로 신성희의 작품세계는 확장됐다.
특히 ‘꾸띠아주’와 ‘누아주’ 시리즈는 작가가 완성한 평면 추상을 해체하여 박음질하거나 엮고 꼬는 방식을 통해 캔버스의 2차원 평면을 넘어, 엮이고 꼬이는 사건이 벌어진 3차원의 공간이자 장소로서의 회화로 나아간, 유연하게 확장된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시리즈 작업이다. 2차원 회화의 평면성을 파괴하고 화면에 3차원적 입체와 부피감을 도입한 탈회화적 방법론을 통해 신성희의 ‘꾸띠아주’와 ‘누아주’는 콜라주에 버금가는 회화적 혁명이라고 평가된다.
갤러리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1층 공간은 파리를 오가며 성북동 작업실에 머물던 시기에 완성된 작업들이다. 전시장 가운데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회화로부터〉(2009)는 ‘누아주’ 시리즈의 비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색의 연금술사로도 불렸던 작가는 말려진 캔버스 롤을 바닥에 펼쳐 만족할 때까지 액션 페인팅 스타일의 추상회화를 그렸다. 다음으로 그 캔버스를 뒤집어 자로 정확히 일정 간격으로 선을 그어 가위로 잘라냈다. 잘린 색 띠들은 작업실 한쪽에 정렬되어 걸렸다. 작업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면 마치 거미가 거미줄로 집을 짓듯 신성희는 직관적으로 색 띠들을 직조해 입체적인 회화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2차원의 평면 캔버스는 1차원적 선으로 치환되었다가 화가의 손에 의해 허공에서 재조합되어 입체적인 몸을 가진 회화로 완성되었다.
중앙 벽의 〈공간별곡〉(2009)은 ‘누아주’ 시리즈 중 가장 큰 스케일의 작업으로 최소 서너 점의 평면 추상 회화가 해체되었다가 다시 엮어져 완성된 대작이다. 작가는 한 겹 이상의 겹들이 중첩되고 교차하며 짜낸 ‘누아주’ 시리즈에 〈공간별곡〉이라는 제목을 부여했다. 이 정도 규모의 〈공간별곡〉 작업은 작가 작품 전체에서 단 3점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유의 다차원적 시간성과 공간성을 담은 회화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업으로 갤러리현대 전시를 통해서는 처음으로 소개된다. ‘누아주’ 시리즈는 화가로서 그가 겪어온 회화적 고민과 탐구, 장고의 실험과 진통이 가져온 창조적 결실이자, 평면 페인팅으로 평면성 그 자체를 넘어서고 입체와 평면의 합일을 이루는 새로운 개념의 회화이다. 자신이 그린 캔버스를 자신의 손으로 자르고 찢는 파괴의 고통을 보상하듯, ‘누아주’ 시리즈는 작가에게도 놀라운 미학적 발견과 창작의 희열을 선사했다. 비록 이른 작고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신성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파리 개선문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열정을 불태웠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평평한 화면을 넘어서는, 회화의 비전을 선구적으로 잘 드러내는 삼부작 회화 〈공심(空心)〉(1971)이 갤러리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된다. 〈공심(空心)〉은 초현실주의 화풍의 내러티브가 담긴 신성희가 23세에 완성한 회화로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작가에게 유명세를 안겨 준 바로 그 작업이다. 미술사가 강태희(1947–2023)는 〈공심(空心)〉 삼부작에 대해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창문 아래에 잠자던 여성이 벽에서 분리된 창문이 일그러진 채 공간에 부유하자 놀라 사라지며 그 자리에 그의 싸인 만이 남아있는 이 흥미로운 연작에서 창틀은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을 향해 돌출하고 급기야는 공간에 떠 있지만 그 기본 형태는 와해하지 않는다.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돌이켜보면 신성희의 초기 마대 작업은 이 연작의 첫 장면의 창을, 그리고 후기의 엮음 작업은 마지막 창의 모습을 예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인은 창의 예고된 변화에 투신한 그의 집념을 가시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같은 해에 그는 〈공〉 이라는 제목으로 창틀을 은색으로 칠한 입체 작업을 국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이런 창 작업들을 놓고 보면 그는 처음부터 캔버스와 그 틀의 주어진 형태 그리고 입체화한 평면 화면에 대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고, 주어진 소여인 창은 그에게 익숙한 하나의 공간이자 동시에 끝 간데없이 확장되는 창공 같은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또한, 지하 전시장은 파리 작업실에서 탄생한 1980년대의 ‘콜라주’ 시리즈와 ‘꾸띠아주’ 시리즈의 대표작들을 ‘창’이라는 모티브에 착안하여 연출된다. 〈공심(空心)〉과 마주한 벽면에는 ‘꾸띠아주’ 시리즈의 대표작인 〈연속성의 마무리〉 3점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천장에 매달린 채로 작품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감상할 수 있도록 소개된다. 작가는 1980년 파리에 도착해서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스테인드글라스로 쏟아지는 빛의 향유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감을 얻어 1970년대 내내 매진했던 ‘마대 회화’를 떠나 폭발하는 색채 조각들이 직조되어 입체적인 구조 공간이 되는 콜라주 회화를 탐구하기에 이르게 된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아예 두 개의 완성된 태양 빛을 닮은 추상 회화를 정밀하게 5센티미터 폭으로 재단하고 재봉틀로 박음질하여 천의 솔기가 그대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하나의 입체적인 회화로 완성하는 ‘꾸띠아주’ 시리즈로 옮겨가게 된다.
전시장 2층에서는 작가가 생애 절정기에 다양한 형식으로 탐구했던 ‘누아주’ 시리즈로 채워진다. 추상화로 완성한 평면 캔버스에 정교하게 칼집을 내어 다른 평면 추상에서 잘라 낸 색 띠를 엮어 마치 평면에 색의 진동이 일어난 듯한 색 조합이 돋보이는 〈평면의 진동〉 연작, 완성된 한 점의 평면 추상화를 얇은 선으로 해체하여 뻥 뚫린 구멍 사이 사이로 색 띠들이 직조되며 입체적인 회화를 완성하는 〈공간별곡〉 연작, 해체된 캔버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공간을 향하여〉 연작, 꼬리가 긴 색 띠들이 촘촘하게 매듭지어진 〈결합〉 연작 등 다양한 ‘누아주’ 시리즈의 변주를 한 공간에서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오래 동안 사용해서 닳아 버린 붓이나 가위, 자, 연필 등이 등장하거나 거울이 부착되어 보는 이의 얼굴을 반추하는 ‘누아주’ 작업의 〈자화상〉 두 점 소개된다.
신성희는 40여 년에 걸친 화업 동안 캔버스 작업에 몰두했다. 2차원의 평면 화면을 1차원적 선으로 완전히 해체하고 해체된 캔버스를 엮어 수직과 수평 차원에서 공명하게 하는, 수많은 사건과 시간이 짜이는 공간으로서의 입체적 회화를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재봉질과 엮기를 통해 구축된 회화적 공간은 20세기 예술가들의 화풍 유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중요한 진전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는 깊이 한국적이면서도 대담하게 서구적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적이고 또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작가에 관하여
신성희는 1948년 안산에서 출생했다. 1966년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홍익대학교 회화과 진학하였다. 1968년 《신인예술상전》 신인예술상, 1969년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 1971년 초현실주의 화풍의 〈공심(空心)〉 3부작으로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1980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30여 년간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 신성희는 보두앙 르봉, 파리, 프랑스(2022, 2016, 2000, 1997); 갤러리 프로아르타, 취리히, 스위스(2013, 2009, 2006, 2003, 2000);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미국(2002, 1999); INAX 갤러리(2002), 도쿄, 일본; 갤러리 꽁베흐정스, 낭트, 프랑스(1998); 시그마갤러리, 뉴욕, 미국(1993); 엘랑꾸르트화랑, 엘랑꾸르트, 프랑스(1983) 등 국내외 주요 갤러리와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갤러리현대는 1988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이탈리아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던 팔라초 카보초에서의 미니 회고전을 포함하여 2025년까지 총 10회의 개인전을 함께 했다. 그의 최근 미술관 회고전은 2022년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주요 단체전은 환기미술관, 서울(1994); 그랑 팔레, 파리, 프랑스(1982, 1981, 1980); 도쿄도 미술관, 도쿄, 일본(1976) 등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작품은 유네스코 본부, 파리; 프랑스 현대미술 수장고(FNAC),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경기도미술관, 안산;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환기미술관, 서울; 호암미술관, 용인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는 2009년 서울에서 작고할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