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수 LP사진. (사진출처=지구레코드)
고복수 LP사진 (사진출처=지구레코드)

[서울시티=김청월 기자] 1911년 12월 29일, 대한민국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수 고복수가 울산에서 태어났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가수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가족의 중심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인생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흘러온 우리 음악사의 일면을 보여준다.

고복수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데뷔하여 큰 사랑을 받은 가수다. 그의 음악은 당시의 시대적 고난과 이별, 그리움, 향수를 담아내며 수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대표곡인 ‘타향살이’는 바로 이러한 고복수의 음악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곡이다.

“타향은 슬프더라. 정든 고향을 떠나올 때 가슴이 메이더라.”

이 노랫말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아픔 속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곡은 단순한 유행가를 넘어, 당시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대표곡인 ‘짝사랑’은 고복수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감정이 풍부한 그의 창법과 서정적인 가사는 청중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당시 라디오와 축음기를 통해 고복수의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고, 그는 단숨에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짝사랑 l 고복수]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 출렁 목이 맵니다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 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 살랑 맴을 돕니다

고복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그의 아내 황금심이다. 황금심 역시 대한민국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가수로, 남편과 함께 많은 무대를 누볐다. 부부는 서로의 음악적 동지로서 평생을 함께하며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장을 만들어갔다.

특히 황금심은 고복수와의 듀엣을 통해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전달했고, 이는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부부를 넘어, 동료이자 예술적 파트너로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고복수는 세 아들 고영준, 고영민, 고병준을 두었다. 그는 예술 활동 외에도 가족과의 시간을 중요시하며 가정적인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복수의 음악적 유산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후손들은 그가 남긴 유산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재조명되고 있다. 많은 후배 가수들이 고복수의 곡을 리메이크하며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으며, 그의 삶과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연구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

고복수의 음악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노래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곡들은 시대적 아픔을 품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노래했던 그는 진정한 시대의 예술가였다.

그의 대표곡 ‘타향살이’와 ‘짝사랑’은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리움과 애수를 전한다. 이는 고복수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준다는 점을 증명한다.

[타향살이 l 고복수 ]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이 내 신세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1911년 12월 29일 울산에서 태어난 고복수는 단순히 노래를 부른 가수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예술가로서의 열정,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시대적 아픔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음악이 남긴 감동과 울림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고복수의 삶과 음악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줄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이 가지는 힘과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다. 1911년 울산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는 아름다운 전설로 남아 있다.

저작권자 © 서울시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