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엔 영흥도 엑스레이작전이 있었다

올해 인천상륙작전 75주년, 숨은 공신 영흥도 엑스레이작전 돌아보기

2025-11-25     글·사진 김진걸 작가
영흥면 해군영흥도전적비

“9월 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혀라.”

1950년 9월, 팔미도에 특명이 떨어진다. 비밀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도쿄(東京) 유엔군 총사령부가 팔미도에 들어가 있던 한국 부대 ‘켈로(Korea Liaison Office, KLO)’에 등대 점화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첩보 활동을 벌인 켈로 부대원들은 비밀리에 팔미도에 잠입해 그 시각 등대에 불을 밝힌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점등이었다. 

이튿날 새벽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10만 병력과 대함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시작한다. 그렇게 1950년 9월 15일 새벽 6시 월미도(그린비치). 구축함의 함포 사격, 항공기의 폭격과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전격 인천에 상륙한다.

인천상륙작전에서 월미도 우선 점령은 필수적이었다. 지상군은 상륙 지점을 크게 레드비치, 블루비치, 그린비치으로 나누었다. 병참 물자 하역 지역인 인천 내항을 옐로비치로, 인천역 가까운 지점을 적색해안으로 각각 명명한다. 월미도는 특히 공격과 방어 모든 측면에서 가장 먼저 장악해야 하는 중요 지점이었다. 때는 남한 땅의 9할이 북에 점령당한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그렇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13일 만에 서울 중앙청엔 태극기가 휘날린다.

팔미도등대

# 해군첩보대원 17인 영흥도 잠입,
청년의용대와 첩보 활동 벌여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순식간에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엔 숨은 공신이 있었으니 바로 ‘영흥도 엑스레이작전’이 그것이었다.

엑스레이란 작전명은 ‘적의 내부를 투시하듯 탐지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어선 ‘백구호’를 타고 8월 18일 부산을 출발해 24일부터 9월 14일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장렬하게 산화한 해군 첩보대원들과 영흥도 주민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하루 전인 1950년 9월14일 새벽 0시. 대부도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대대병력이 영흥도에 포탄을 날리며 총공세에 나선다. 해군첩보부대원들이 작전을 준비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북한군들이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때 임병래 소위를 비롯한 해군첩보부대원 6명과 강태원 등 영흥도 청년 의용대원 30여 명은 대대급 북한군 병력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영흥면 십리포해변

인천상륙작전 개시 시간이 가까워오며 첩보원 4인은 십리포해안을 통해 보트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미처 탈출하지 못 하고 적에게 포위된 임병래 소위, 홍시욱 삼등병조는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적에게 생포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의 기밀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자결을 택한 것이다. 

이들 해군첩보부대원들과 영흥도 청년 의용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한 임무명은 ‘엑스레이작전’이었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사령부에 보고하는 게 대원들의 임무였다.

#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인 9월 13일
북한군 대대병력 영흥도 기습공격, 14인 전사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 내리 산314 ‘해군영흥도전적비’ 앞에는 화강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임병래, 박동진, 홍시욱, 이삼재, 김재경, 홍희표, 탁형각, 김용주 (해군 영흥도 지구 전투 전사자, 1950년 8월 13일~1950년 9월 15일).
강태원, 강대원, 박준석, 김상식, 김성옥, 노재후 (대한청년단방위대원, 1950년 9월 14일 전사)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이들은 엑스레이작전 당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순국한 대원들이다.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전, 인천에서 3개의 특수작전이 전개된다. 엑스레이(X-ray), 리(Lee), 트루디 잭슨(Trudy Jackson) 작전(Operation)이 그것이다.

‘엑스레이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차질없은 성공을 위한 정보수집 등 첩보작전이었고 그에 앞선 ‘리작전’은 엑스레이작전을 수행할 거점으로 삼을 영흥도와 덕적도 등 도서탈환 작전이었다. ‘리작전’은 작전 책임자인 이희정 중령의 성을 따서 붙여졌다. 트루디 잭슨작전은 상륙함대를 유도할 팔미도등대에 점등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1950년 8월 24일 새벽, 17명의 첩보대원들이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상륙한다. 엑스레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8월18일 0시 부산항을 출발해 6일만에 도착한 해군첩보부대원들이었다. 

영흥도 잠입에 성공한 해군첩보부대원들은 옛 영흥초등학교 교실에 본부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첩보활동을 시작한다. 영흥도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영흥도 청년 30여명이 첩보부대에 합류한다. 고향의 산하를 잘 아는 청년의용대는 마을 순찰을 담당하고 첩보대원들은 북한군 방어진지 현황, 보급선, 해로에 매설한 기뢰, 상륙지점의 지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만반의 준비를 갖춘 9월13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틀전이었다. 극동군사령부의 ‘모든 임무를 마치고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11명의 첩보부대원들이 먼저 영흥도를 빠져나간 시점이었다. 나머지 6명의 첩보대원들이 본부를 정리하고 떠나려는 순간, 어디선가 총성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어 포탄이 날아들었다.

선재도와 대부도에 머물며 해군첩보부대원들의 동태를 파악한 북한군 1개대대가 영흥도를 기습공격해 온 것이다. 6명의 첩보대원 가운데 4명은 포화를 뚫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삼등병조는 미처 섬을 빠져 나가지 못한 채 자결하고 만다. 이 교전에서 영흥도 의용대원 6명도 목숨을 잃고 만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은 인천상륙작전의 불씨가 되어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다.

영흥도 X-RAY작전, 특수임무전사자 14위 추모식

# 옹진군, 영흥도 ‘해군영흥도전적비’에서
매년 엑스레이작전 특수임무전사자 추모식 열어 

옹진군은 매년 엑스레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산화한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매년 열어왔다. 지난 9월 9일에도 영흥도 해군전적비에서 엑스레이작전 특수임무전사자 14위를 기리는 추모식이 엄숙히 거행됐다. 대한민국특수임무유공자회 인천광역시지부(지부장 유계열) 주관으로 개최된 이날 행사엔 문경복 옹진군수를 비롯해 영흥 청년의용대원 유가족, 인천시 보훈정책과장 등 약 200여 명이 참석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렸다. 추모식에선 영흥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유가족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렸다.

문경복 옹진군수는 “모든 유가족분들게 존경과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그분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 새롭고 신나는 옹진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인 2025년 겨울. 영흥도의 맑은 하늘에 전사자들의 얼굴이 구름처럼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