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산다 - 달콤하고도 살벌한” 2GIL29 GALLERY 민준홍 개인전, '그럼에도 풍차는 돌아간다'
그가 말했기 때문일까. 기억에 남아서일까. 한병철의 신간이 나오면 도시를 담아낸 민준홍의 회화가 떠올랐다.“철학서‘피로사회’속 병들고 있는 현대인이라는 주제에 적극 공감했고 이후 작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민준홍은 자주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알게 된다. 그가 한병철의 사유에 얼마만큼 공감하는지.
도시 아니 정확하게는 도심에서였다. 명동에 위치한 갤러리의 문을 열었다. 4년 전인, 2021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유학파 작가들의 단체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발을 들였다. 어둡거나 낮은 채도의 작품들 사이에서 강렬한 색을 뽐내는 그림이 보였다. 유난히. 그 에너지에 이끌렸다. 빌딩들이 날고 있다. 경계 없이. 바짝 다가섰다. 들여다볼수록 어지럽다. 건물들은 제멋대로다. 불안해진다. 흩어져 있는 사각 프레임들은 공간을 헤집는다. 압박감이 밀려온다.
나체의 사람들이 떠다닌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은 반듯한 건물 옆에 얼굴을 숨긴 채로. 캡션을 재빠르게 흘깃했다. <Utopian complex>(2021) 란다. 유토피아라고. 반어적 의미인가? 당혹스럽다. 그 옆의 작품 <Urban Methodology>(2021)에는 아무도 없다. 공허해진다. 민준홍과의 첫 만남이었다.
흐르는 날들 속에서 문득문득 그의 그림이 떠올랐다. 일상이 가쁜 어느 날은 특히.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빌딩들이 도돌이표처럼 돌고 돈다. 끊임없이. 어떤 날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림에서처럼 커다란 사각박스로 얼굴을 봉인하고.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던 그런 하루에는. 의문은 커져만 갔다. 민준홍의 도시를 대하는 마음이. 조각 낸 패턴 속 감춰둔 속내가. 냉소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자주 꺼내보았다. 그의 그림들을. 화려한 색감 속을 들여다보면 애처롭다. 소파와 의자를 비워 둔 채 불안정하게 서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힘겨운 시간들이 이어질 때면 어김없이 민준홍의 그림이 생각났다. 그가 그려낸 도시 공간이 자꾸만 속을 찔렀다.
오래도록 풀리지 않던 난제들과 함께. 민준홍의 작품세계가 궁금해진 이유다. 9,093km의 직선거리를 넘어 그를 쫓았다. 2014년 유학생활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런던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 중이다.
첫 감정이 궁금하다. 이길이구 갤러리에서 열리는 민준홍의 개인전 <그럼에도, 풍차는 돌아간다> 전시에서 당신이 느끼게 될 새삼 슬퍼졌다. <Consternation life style>(2023년) 시리즈를 직접 보았을 때. SNS를 통해 본 민준홍의 신작들을 직접 맞닥뜨렸다. 마침내 대면한 <Consternation Life Style>(2024) 시리즈, <Fancy Limbo>(2024) 시리즈 등 최근 작품들은 <Utopian Complex>, <Urban Methodology>와 닮은 듯 달랐다. 진하게 뿜어내는 색들은 여전하다. 네온사인처럼 현란한 빛을 낸다. 좀 더 경쾌해졌다. 리듬감이 담겼다. 그 다채로움에 잠시 들떴다가 곧 초조해진다. 캔버스의 크기가 작아져서일까. 겨우 용기를 낸다. 좁아진 공간 속 인물들과 마주할 수 있는.
달라졌다. 홀로 있다. 사람들은 아니 한 명만이 남겨졌다. 덩그러니. 불과 3, 4년 전만 해도 민준홍의 회화안에서 사람들은 함께였다. 비록 멀찍이 떨어져 닿지 않았지만. 이제 서로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야속하다. 획정된 듯 규격화된 구조는 더 세밀해졌다. 패턴들은 더 잘게 분절되었다. 질서를 지켜 자리를 차지했다.
그 매끈함에 속이 쓰리다. 마음이 쪼개진다. 작품 속 더욱 분열된 소실점처럼. 민준홍은 말한다. 홀로 있는 인물들에게‘외로움을 감당하라’고. 반복되는 기이한 문양들의 선이 차갑다. 일그러져 버렸다. 분명 동그랗고 둥근 원들인 데. 무력해진다. 민준홍의 속내를 모르겠다. 왜일까. 순간 알아챘다. 2021년부터 2023년이란 제작연도가 힌트였다.
“코로나라는 외부적 요인에 인해 작업실에 억지로 갇혔다. 그 압박감에 억눌릴 듯했다” 민준홍은 고백한다. 더욱 형형해진 원색과 분절을 거듭하는 패턴의 심화, 갇혀있듯 홀로 된 사람들까지. 변화의 이유였다.
<The Debris from The Future Past>, <Future’s present>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온 민준홍의 설치 작업이 다 눈에 담기는 작품의 겉모습은 명확하다. 도시의 풍경을 재현했다. 제목이 모호하다. <The Debris from The Future Past>(2020)는 영국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한걸음 떨어져 보았을 때 반듯하게 구축된 구조물들은 도시의 위용을 뽐내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얼핏 찬사인 듯하다. 작가 본인이 자라나고 활동했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시의 단정함에 대한. 보는 이도 쉬이 도시를 떠올리게 된다. 곧게 치솟아 있는 마천루와 빌딩숲들 대칭을 맞춘 균형까지 실제적이다. 도시에 사는 당신은‘익숙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욕망이 일었다. 2023년 프랑스 파리의 한국문화원 전시에서 선보인 민준홍의 영상 작업 <Real Time Purgatory>를 유튜브로 보았다. 확장하고 뻗어나가는 거대 도시를 옮겨 놓았다. 전시장의 삼 면을 가득 채우며 재생하는 이미지들 속 도시의 하루가 유영한다. 끊임없이 돌고 돈다. 확장하고 뻗어간다. 이토록 세련된 감각과 구조를 알고 있다고 은근히 과시하는 듯하다. 민준홍은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교묘한 우월감을 살려낸다. 은밀하지만 선명하게.
<The Sleek Altar Series>(2024)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작업이다. 직역해본다.‘매끈한 제단’역시 어렵다. 제목을 의미를 풀어내기가. 서 있다. 곧다. 조금도 기울지 않았다. 도형들이 접합되어 이어졌다. 질서 정연하게. 침잠하는 무채색부터 어둡고도 진한 원색들로 채워졌다. 순간적으로 숨통이 조인다. 그러하다. 민준홍은 비틀고 있다. 기어이. 모던하고 세련된 도시의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우리는 사실 잘 알고 있다. 하루마다 맞닥뜨린다. 도시의 싸늘한 속성을. 과한 경쟁에 앓는다. 시름시름. 지쳐있다.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는 인간관계의 얽히고설킴에 한숨을 뱉는다. 이제 알 거 같다. 직역 아닌 의역이 가능해진다. <The Sleek Altar Series>에 대해. 민준홍은 도시의 이면을 헤집는다. 불편한 속성을 꺼내놓는다. 반듯함 속에 기이함이 있다. 질서 정연하게 구축된 구조와 가지런한 도형 속에 기묘한 문양과 형태들을 그려냈다. 세밀하고 정교한 펜 드로잉 소리 속 한마디가 들려온다.‘외면하지마, 다시 생각해’라고.
자꾸만 읊조리게 된다.‘묘하다’라고. 민준홍이 작품 안에 새긴 무늬들은 점잖다. 현대 미술의 표상인 난해함과 괴이함을 의도하진 않는다. <The Sleek Altar Series> 시리즈의 설치 구조물 속 얌전하게 자리했던 도형과 무늬들을 이내 평면으로도 꺼내놓았다. Part2, Part 3, Part5로 명명된 작품들은 나무 판넬 위에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마침내. 주름진 한쪽 손이 보인다. 베일 듯 하다. 칼날처럼 깊다. 그 옆에 두 손이 포개졌다. 다소곳하다. 기도의 마 음을 갖게 한다. 꽃의 형상이기도 하고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복잡해진다. 요동친다. 도시 공간에 침투해 있는 병적이고 뒤틀린 관계들이 떠오른다. 머리가 아프다.
민준홍의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다보면 문득 토마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이 떠오른다. 현대 사회의 폐해와 모순을 지적해 온 스위스 출신의 설치 미술가다. 특히 그의 2000년대 초반의 작업이 머리를 스쳤다. 실생활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재료로 작품을 제작한다. 쓰이고 버려진 참고자료들, 종이 박스, 팬 인증물 등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재료들이다. 친근하지만 쓰임을 다했다. 허쉬혼은 자신의 아카이브 작업을 ‘자본주의의 쓰레기통’이라 명명했다. 도발적이다. 직설적인 메시지다. 가이드 라인을 일방적으로 제공하고 따르라고 이끈다.
민준홍은 다르게 표현한다. 우회한다. 직선으로 내달리지 않는다. 구축하고 보여줄 뿐이다. 5년 전 그는 주변에서 채집한 폐가구와 폐지 생필품들을 구조물에 접합했다. 그가 설계한 공간을 찬찬히 응시할 때 우리는 돌아보게 된다. 도시 안에서 내던져지고 버려진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가 그리고 우리가.
당황했다. <The Retinal chain reaction>(2024)에 대한 솔직한 심정이다. description은 가능하다. 큰 눈을 치켜뜨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 눈 맞추고 싶은 귀여움이다. 모던 도시 감성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인 카페에서 기르는. 하트 모양과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보인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채팅방에 입력하는. 반갑다. 시선을 살짝 옮기면 또 다르다. 폭발하고 날아간다. 치솟는 연기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알 수 없다. 생각은 이어진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떠다니고 바르게 각이 잡힌 도형들이 뒤섞여 있다. 불안해진다. 높이 솟은 빌딩들은 슬며시 드러나 있다. 민준홍은 쉬이 허락지 않는다. 보는 이가 단 하나에 감정에 머무는 것을. 뒤섞이고 헤집어 놓는다.
“모던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동양적인 패턴이 들어가니 또 새롭네요” 민준홍의 인스타그램에 달린 댓글이다. <The Retinal chain reaction>(2024) 시리즈에 대해서다. 동의한다. 적극. 변주되었다. 지난해 민준홍은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린 ‘포커스 아트페어 2024’에서 작품 <The Retinal chain reaction>을 선보였다. 확인했다. 민준홍의‘도시’세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동양적인 문양, 불어와 영어와 뒤섞여 있다. 신의 형상일까 미신의 형상일까. 동양적인 모티프들이 성모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과 나란히 자리한다.
신기하다.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서울의 풍경과 겹쳐진다. 유명한 사찰을 지나 큰 교회를 지나가야 광화문과 안국역 사이에 자리한 직장에 도착한다. 민준홍이 런던에서 그린 그림인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보인다. 서울에 대한 작가의 속마음을 물었다. 그가 답했다.
“서울의 경험, 기억, 관계, 인상은 나의 무의식에 가장 뿌리 깊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웅크리고 있고 여기서 많은 영감을 차용한다. 그 과정은 단순하게 행복한 과정만은 아니다. '서울'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친숙한 공간이지만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잔상이 존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감정이 요동친다. 떨림일까 흥분일까. 그의 답변에 동의해서일까, 작품에 한껏 동화되어서 일까. 이 기분을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민준홍의 캔버스 속 귀신인지 수호신인지 알 수 없는 모티브처럼.
“도시를 둘러싼 물리적 공간에 대한 관심은 점차 그 안의 인간과 속성, 사물에 대한 흥미로 옮겨갔다” 민준홍은 최근의 작가노트를 통해 답한다. 몇 년 전 작업에서 폐품으로 빌딩숲을 재현하는 도시를 세웠다. 버려진 것을 애도하듯 무채색으로. 얼굴을 숨긴 인간들은 움직인다. 현란한 색채의 캔버스 속에서. 갈 곳을 잃었다는 듯이. 속이 쓰려온다.
민준홍은 머무르지 않고 탐험한다. 자유롭게. 이제 그는 현대 자본주의와 결합한 온라인 세상을 파헤치며 묻는다.
아프게.‘번듯한 도시 속 당신의 하루하루는 반듯한가’ 작품의 소재는 업데이트 되었다. 어지럽다. 그의 최근 영상 작업을 보노라면. 쉴 새 없이 화면이 바뀐다.‘레전드만 50분 모음’,‘나오자마자 솔드 아웃된 백’,‘해고통보’글자들이 튀어나오다 사라진다. 익숙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장면이기에. 쇼츠와 틱톡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코로나를 겪으며 온라인 세상은 마침내 현대 사회의 왕좌를 차지했다. 멀미가 난다. 조금씩 아니 한껏 보정된 셀카를 올려 보았는가. 민준홍의 작업은 현대인의 날 것의 자아를 맞닥뜨리게 한다. 연약한 현대인의 초상을. 부끄러워진다.
영상의 배경화면으로 놓인 민준홍의 회화가 다르게 보인다. 고상함이 증발했다. 이지적인 패턴들이 무질서해 보인다. 알록달록한 색채들이 범람한다. 평면에서의 질서를 뒤튼다. 반듯함을 내던졌다. 혼돈스럽다. 인정한다. 우리 모두는 빠져있다. 알고리즘의 망망대해에. 스스로가 취향이라 믿는 콘텐츠를 선택한다. 착각이다. SNS, 유튜브 어플을 연다. 보이는‘쇼츠’중 하나를 클릭한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끌려 다닌다. 속절없이.
알았다. 겹쳐지고 포개지는 민준홍이 그려낸 도상들이 영상을 통해 특히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를.‘너의 중독을 직면하라는’경고다. 자아를 잃기 전에. “예전에는 건물의 실제 생김새를 담았으나 이제 현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형태를 그리고 있다” 민준홍은 말한다. 그도 경험했다. 유학생활과 코로나를 경험하며 개인이 어떻게 온라인 세계에 잠식당할 수 있는 지를.
하나의 미술사조로 정의하기 어렵다. 아니 특정하고 싶지 않다. 추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서사가 읽힌다. 교차하는 직선들 사이에서. 사실주의라고 칭하기엔(실재의 재현이라기에는) 도상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자로 잰 듯 정확한 길이로 구현된 다각형들의 틈새 사이로 도시의 가능성과 불안이 교차한다. 순도 높은 조형의 세계로 안내하다가 감정을 들추어낸다. 표정을 달리하는 도시의 낮과 밤 같다.
‘기하학적이다’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가로세로의 정확한 짜임, 두드러지는 면과 각, 직선과 사선, 지그재그 형태의 띠 속에 현대인의 공포가 꿈틀댄다. 잔뜩. <Algorithm Chronology Episode> (2024) 시리즈는 공격적이다.
기하학적 도형들은 말한다. “경험과 기억?, 당신은 단지 일시적인 쾌락과 말초적인 에디션에 대해 말할 뿐이지” 그림 속 새겨 넣은 대사다. 꼬집는다. 왜곡된 형상들은 얼굴을 숨긴 채 말하는 중이다. 패턴 속에 정직한 사유가 깃들었다. 서사를 토해낸다. 기하학적 균형을 맞추고.
‘격리와 형상’ 들뢰즈의 개념이 떠올랐다. 민준홍의 캔버스 속 익숙하고도 낯선 도상들에 대해 고민한 끝에. 민준홍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났다. 모티프는 점차 왜곡되고 분리되었다. 테이크 아웃 커피 케이스의 가운데가 갈라졌다. 난데없이 다면체들이 끼어있다. 당혹스럽다. 들뢰즈가 정의한‘자율성’과 맞닿아 있다면 과한 해석일까. 민준홍의 작품 세계는 이토록 입체적이다.
‘도시에 대한 모든 것’이라 말하겠다. 민준홍의 최근 10여 년의 작업을 아우르는 키워드에 대해. 서울에서 자라났 다.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에서 학·석사를 졸업했고 영국 University College London Fine Art 에서 석사를 마쳤다. 우 등 졸업이었다. 나고 자란 서울을 지나 베를린, 런던까지 작업의 거점을 옮겼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알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이 도시에 대해 양면적 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각자의 삶의 파편들이 모여 한데 얽히고설켜 돌아가 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회화를 넘어 설치, 영상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스스로를 ‘미술가’라 명명하며.
그의 세계 속에서 도시인이 걷고 있다. 터덜터덜. 뉴욕의 빌딩 숲이 솟아있다. 위용을 자랑하듯이. 런던의 안개가 보인다. 뿌옇다. 선연하기도 처연하기도 하다. 도시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모퉁이 어딘가에 우리 가 서 있다. 어떤 날은 손을 뻗는다. 기운차게 도시인임을 뽐내면서. 다른 날은 눈물짓는다. 도시의 냉혹함에 져버 렸기에. 뒤로 돌아 얼굴을 숨겨본다. 민준홍의 회화 속 익명의 도시인처럼.
바람이 불어야 한다. 풍차가 돌기 위해서는. 상상해본다. 맑고 청신한 바람결을. 민준홍의 그림 속 도시에 자리한 단정하고 위압적인 건물들 사이로 불어오는. 캔버스 속 인물들이 무거운 정육면체를 벗는다. 숨통이 트인다. <그 럼에도, 풍차는 돌아간다> 속 민준홍이 구축한 공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겠다. 우리는 도시에 산다. 달콤하고 살 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