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대륙에서 찾는 인간성의 흔적
[서울시티=김청월 기자] 키스 로(Keith Lowe)의 야만대륙(Barbarous Continent)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을 배경으로, 전쟁이 남긴 폭력과 혼란을 냉정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한 역사적 기록물이다. 이 책은 전후 유럽을 단순히 폐허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전쟁이 인간의 윤리와 가치체계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인간 군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키스 로는 이 책을 통해 전후 유럽의 혼란을 단순한 물리적 재건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윤리적, 문화적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한다.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폭력, 복수, 민족적 갈등, 그리고 난민 문제는 단순히 전쟁의 결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이를 인간 본성과 공동체의 붕괴가 빚어낸 문제로 제시하며, 야만성과 문명이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인류가 지니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야만대륙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속된 폭력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종전 이후에도 유럽 각지에서는 민족 간 보복, 정치적 숙청, 그리고 무법 상태가 이어졌다. 독일 점령지에서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된 나치 협력자들이 군중의 손에 죽임을 당하거나, 민족 정화라는 이름으로 소수 민족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이 흔했다. 이는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된 야만성이 폭발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키스 로는 이를 단순한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각자의 입장에서 폭력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탐구한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지만, 승리자 또한 잔혹한 선택을 해야 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과연 인간은 폭력을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혹은 폭력은 또 다른 야만으로 우리를 이끄는가?
전후 유럽은 수백만 명의 난민과 실향민으로 넘쳐났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이들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유대인 생존자들,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계 민족, 소련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이들 모두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난민들이 새로운 삶을 찾는 과정은 또 다른 갈등을 낳았다. 지역 주민과의 충돌, 자원의 부족, 그리고 난민 내부의 계층적 갈등은 유럽 재건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키스 로는 난민 문제를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이들이 겪은 개인적 비극과 집단적 고통을 통해, 우리가 ‘문명화된 사회’라 부르는 체제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은 단순히 물리적 파괴만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연대감을 무너뜨리고,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야만대륙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야만성과 문명을 나누는 선이 얼마나 불확실한가에 대한 통찰이다. 전쟁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문명을 부정하고 야만으로 회귀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키스 로는 그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한다. 폐허 속에서 인류는 다시 공동체를 세우고, 파괴된 윤리와 가치를 재건하려 노력한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쟁의 중심지였던 지역에서 보이는 재건의 움직임은 단순한 물리적 복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resilient(회복력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키스 로는 이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야만의 순간을 넘어, 다시 문명을 세울 수 있는가?
야만대륙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책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분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위협한다. 키스 로의 서술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난민 문제,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민족적 갈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이다. 우리가 과거의 야만성을 이해하고 극복하지 않는다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
야만대륙은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과 연대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역사책을 넘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성찰을 제시하는 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야만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찾으려는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