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수 (사)전자·정보인협회 회장

바로크(baroque)는 16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걸쳐 유럽에서 성행한 예술 양식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균제와 조화에 대한 파격적이고 감각적 효과를 노린 동정(動的)인 표현을 특징으로 하였다. 본래는 극적인 공간 표현, 축선(軸線)의 강조, 풍부한 장식 등을 특색으로 하는 건축에 대해 말하였는데, 격심한 정서표현이나 유동감(流動感)을 가진 동시대의 미술·문학·음악 등의 경향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시대 개념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바로크 음악(baroque 音樂)이란 음악역사상 대략 1580~1750년간의 음악을 일컫는다. 그리고 바로크라고 하는 시대양식 개념은 본래 미술사의 분야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음악사의 분야로 이행되어 왔다. 그 최초의 시도는 1920년의 쿠르토 작스의 논문 《바로크 음악》이었다.

여기에서 작스는 미술사가(美術史家) 벨플린을 모방하여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음악예술 사이에 선적(線的)과 회화적 평면 효과와 심층(深層) 효과, 폐쇄된 형식과 개방된 형식, 다수성(多數性)과 동일성, 명료성과 불명료라고 하는 5쌍의 서로 대립하는 기본개념이 인정되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 했다. 이 시도는 예술의 장르의 기본적인 차이 때문에 반드시 정녕 성공했다고만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다수의 논문이라든가 저작을 통해서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성행했었던 연주활동에 의해서 이 시대의 음악이 개척되었다. 이에 따라 바로크음악이라고 하는 말은 널리 일반화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바로크 음악의 특기할만한 형식상의 특징은 그 음공간(音空間)의 조성(組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에 앞선 르네상스와 뒤에 그것에 계속하는 고전파의 시대가 음역(音域) 전체에 걸쳐서 동질적으로 융화한 울림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상호간에 긴장력을 품은 수평적인 선의 길항(拮抗 : 서로 버티고 대항함) 관계를 그 생명으로 하고 있다. 

외성부(外聲部)의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대극적(對極的)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내성부의 알토나 테너는 음력적(音力的)으로 다소 희박하다. 이와 같은 대극성(對極性)의 원리는 수직적인 음의 공간조성에 여실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음의 횡적 확장에도 역시 나타나게 된다.

즉 크레센도(crescendo; 漸强), 디미누엔도(diminuendo; 漸弱)의 사다리가 없는 이른바 테라스(terrace) 상(狀)의 튜나미크가 바로크 음악의 음력법(音力法)의 기초인 셈이다. 또한 완급법(緩急法)에 있어서도 현저한 구동력을 지니는 알레그로(allegro)와 가요적인 아다지오(adagio)가 인접하면서 대형식(大刑式)을 낳게 된다.

사회사적(社會史的)으로 본 경우, 바로크 음악은 절대왕정을 배경으로 하는 궁정 생활, 근세의 시민사회의 상승기에 있어서의 도시의 생활 및 유럽의 정신생활 전반에 대해 한층 보편적인 규제력을 갖고 있었던 교회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가의 사회적 존재는 상호간에 교류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궁정음악가·도시 악사(樂士)·교회음악가의 어느 쪽엔가 한 편에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의 직분에 과해지는 음악적인 수요(需要)의 형식과 기회에 좇아서 활동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활동은 일단 기회음악적인 성격이 강하고 직접적·인습적인 것에 언제든지 함입(陷入)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일상적인 수요에 결부됨으로써 건전한 보편성과 합목적적인 성격을 그런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서광은 우선 이탈리아에서 찾아왔다. 가브리엘리(G.Gabrieli)를 중심으로 16세기 말의 베네치아 악파의 화려하고도 극적인 고동(鼓動)에 찬 복합창(複合唱) 양식은 그 이전의 르네상스의 온화한 조화에 찬 폴리포니(Polyphony : 多聲音樂) 예술과는 분명히 일선(一線)을 긋는 것이었다.

이어서 페리(J.Peri) 일당의 손으로 극적인 표현 그 자체를 생명으로 하는 근세의 오페라 형식이 생겨났다. 1640년대에 들어가자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시민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또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宰相) 마자랑의 손으로 프랑스에도 도입됐다. 기악(器樂) 형식의 방면에서도 이탈리아는 동일하게 선진국의 지위에 섰다.

이 방면에서 특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은 소나타 다 카메라(실내 소나타)·소나타 다 키에자(교회 소나타)의 2개의 바로크 소나타 형식과 바로크 실내악의 전형적인 편성인 트리오 소나타의 형식이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일이다. 1680년 이후의 후기 바로크에 들어가자, 바이올린 음악의 발전기가 되고, 볼로냐악파 및 로마·베네치아 악파의 손으로 합주 협주곡과 독주 협주곡의 형식이 확립됐다.

프랑스 바로크시대의 음악은 루이 13세부터 15세에 이르는 2대(二代) 군주의 절대주의적인 지배하에 베르사이유 궁전과 파리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번성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음악 총감독의 지위에 있었던 륄리(J.B.Lully) 이후, 18세기의 라모(J.P.Rameau)에 이르는 궁정오페라나 발레, 그리고 쿠프랭(F.Couperin)을 정점으로 하는 섬세하고 우미한 클라브상(Clavecin) 음악이 특징적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후, 왕정복고시대에 나타난 블로우(J.Blow)·퍼셀(H.Purcell)에 의해서 한때 국민적인 악파가 융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와서는 헨델·보논치니(G.B.Bononcini) 등 외래 음악가에게 활약의 장소를 주었다. 한편 독일의 바로크 음악은 쉬츠(H.Schutz) 및 샤이트(S.Scheidt)·샤인(J.H.Schein)에 의해서 기초가 굳혀졌다. 특히 풍금음악과 교회음악(敎會音樂)에서 독자적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독일어의 barock, 영어, 불어의 baroque는 “기이한, 비뚤어진, 괴상한, 괴이한, 찌그러진, 몹시 과장한, 취미 따위가 이상야릇한, 거치른, 문체가 지나치게 장식적인” 것을 뜻한다. 결국 “바로크”는 17~18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회화·건축·조각·문학·음악·장식 미술의 한 양식으로  일단 정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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