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이 시조는 조선시대의 기생 황진이(黃眞伊)가 쓴 전무후무한 주옥같은 불마(不磨)의 작품이다. 그는 시(詩)·서(書)·음률(音律)에 뛰어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져 내일이야~’,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 시’ 등이 있다. 아직까지도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나 조선시대의 유학자 서경덕(1489~1546)과의 에피소드(episode,逸話)로 미루어 보아 1510~40년대쯤, 중종 연간으로 추측이 된다. 대개 1506~1567로 추정하고 있는 자료도 있다.

기나긴 밤의 독수공방을 이처럼 누구려서 공규속의 제자신의 적막과 고요를 위로하다니. 마음의 품격이 서늘하고 높아, 춘풍 이불 아래에 차곡차곡 담가 두었다가 고운 님 오시는 밤에 굽이마다 늘려 아껴서 쓰겠다는 발상은 심미적이며, 맹랑하고 또한 고혹적이다. 운치와 기품이 넌지시 깔려있어 에로틱을 넘어 파스적이나마(farcically) 숭고하기까지 하다. 승려와 같이 분류된 조선조 팔천(八賤)의 일원으로 어찌 신분의 통한(痛恨)을 느껴 그윽하지 않으리! 그야말로 가슴쓰리고 아프게 몹시 한탄한 밤이 그 얼마인가?

재연하지만 황진이는 조선조 중종·명종(明宗)·선조(宣祖)때의 명기(名妓)였다. 자는 명월(明月), 별명은 진랑(眞娘), 재색을 겸비하고 한시와 시조에 특재가 있었다. 서경덕(徐敬德) 박연 폭포와 아울러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자칭하였다. 일설에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얼굴이 뛰어나고 시와 음률에 능했다고 전한다.

여류한시(女流漢詩)는 사대부들이나 사재가 있는 중인들의 시가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독특하고 별난 세계를 담고 있다. 은근한 기다림 속에서 여성적인 한(恨)과 원망을 노래하는가 하면, 또한 활달하고 거리낌 없는 애정을 맘껏 노래하기도 하면서 출구 없는 캄캄한 공간 속에서 이상적인, 열린 세계를 끝없이 동경하며 이를 은근히 추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다양한 장르 가운데서도 내용의 함축성과 수려한 상징적 표현기법을 특성으로 하는 한시가 대표적 영역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산문이 가지는 직설적이며 논리적인 결구(結構:plot)에서 벗어나 형식의 정제성(精製性)을 중시하면서 쓸모가 있는 내용의 함축과 외연에 충실한 한시가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포괄하는 동양에서 한시가 가장 중심이 되는 문체로 굳건히 자리하게 된 큰 원인이 되었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우수한 문인과 가객들에 비하면 여류시인들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과 여건은 근세 이전의 우리 사회가 폐쇄적이었으며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에 연유한 것이며 따라서 여성들의 활동영역이 크게 한정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이와 같은 현실적인 한계와 모순을 띄어 넘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그러한 조악한 여건 속에서도 여류시인들이 당당히 등장하여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진솔하면서도 극명하게 표출한 것은 우리문학이 가지는 독특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작품을 남기고 있는 약 60여명의 여류시인들은 저 높은 여왕에서부터 서녀, 부실, 말단 기녀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에 이르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문집이나 시집을 남긴 여성들이 있는데 이들의 한시나 시조는 격조, 품격, 내용에 있어서 사대부들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학적 향취를 이룬 여러 여류시인들 중에 특히 우리가 주목할 만 한 여류로는 여럿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황진이, 허난설헌, 계생, 박죽서 등을 들 수 있다.

여류시인들의 시는 그 내용에 있어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恨)과 별리(別離), 애증과 원한의 갈등, 이상세계의 끊임없는 추구 등의 다양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의 작품세계를 통하여 폐쇄적이고 한정적이긴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여인들이 무지막지한 남성위주의 닫힌 세계에서 그들의 함성, 절규, 고함, 역경, 원망, 원한을 감히 엿들을 수 있다. 가여운 여인들이 전통적으로 겪어온 고된 삶을 총체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제는 사실의 진솔한 표현, 보편적이면서도 극히 절제되었지만 숭엄한 사랑의 갈구, 열린 세계로의 끈질긴 동경과 희구, 같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우수성을 여러 앵글에서 살필 수 있는데, 특히 이러한 작품이 창작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그들의 시적 대상을 아무런 윤색, 가식이나 장식 없이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사실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조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이 가지는 유니크한 특징일 것이다. 이러한 여류 중에서도 황진이는 이 장르에서 보기드믄 불세출(不世出)의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시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 심리의 통찰에는 비할 수 없는 넓은 안식(眼識)을 가졌다. 또한 완성과정에 있던 근대 영어의 잠재세력을 극도로 발휘해서 시극미(詩劇美)의 최고를 장식하였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독일·러시아·한국 등 세계 각국어로 다투어 번역되어 세계문학이나 연극에 기념비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는 <불멸의 이순신>이 있고 미국에는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가 있다. 또한 영국인들은 세계 각처에 있는 영연방식민지를 다 내어주더라도 셰익스피어만은 가지고 싶다고 했다. 만약 셰익스피어와 황진이를 놓고 택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주저 없이 단연 똑똑한 황진이를 선택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자존심인 것처럼 황진이는 우리의 보배이며 자긍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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