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의 이야기  /  양여천 시인

 

눈은 눈물을 지워버린다 
찬서리 내린 할아버지 머리에 이고있는 세월도 
눈은 아무런 무게가 없어서 
처마끝 지붕위에서 장독대까지 저만의 세상을 만든다 
눈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서 
아이들의 주먹에 북실북실 눈덩이를 쥐어주고 
눈은 모든 것 위에 내려앉지만 
토실토실한 토끼들도 코를 실룩거리며 하늘을 보게 한다 
눈은 모든 것위에 하얀 홑이불을 덮어주고 
잘했다고, 아주 잘 견뎌왔다고 칭찬해준다 

그래, 눈은 그냥 덮어두라 한다 
그까짓거 대수롭지 않다 한다 
코가 맵도록 울었던 시간도 
하얗게 덮어버려서 찾을 수가 없다 
모두가 할아버지가 되어 허허 웃어버리고 
모두가 강아지가 되어 하얀털옷 입고 깡총깡총 뛰어 다닌다 
반쯤 묻어두었던 장독속에서는 깍두기가 시큼하게 익어가고 있을텐데 
이렇게 덮어버려서는 찾을 수도 없다 
배고픔도 잊어버리라고 너풀너풀 날아와 손짓한다 
아이들은 감자 한덩이도 못 먹었는데 눈을 뭉쳐 먹으며 설탕맛이라고 한다 
한껏 견뎌왔던 삶을 무겁다고 더는 헤치고 못 나가겠다고 했는데 
어깨를 툭툭 털며 일어나라고 한다 
모든 것 위에 있지만 모든 것 아래에 있어주는 눈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져주고 안아주고 다독거려준다 
가장 약하디 약한 생명보다도 
바라보면 눈물같이 부질없는 너는, 

하늘 가신 할머니가 그러모아 머리위에 뿌려주셨던 봄날의 꽃비 같다 
여린 가지를 털면 우수수 바람에 날던 꽃잎의 이파리들 같다 
하늘가면 천사가 되어 다시 돌아와주마 하고 거짓말해놓고 그냥 날아가 버렸던 
그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멀고 먼 하늘에서 
쓸모없어진 날개를 털어 온 사방에 깃털을 던져준다 
그냥 한 번만 다시 와서, 품에 단 한 번만이라도 안아주면 
추운것도 볼이 얼어붙는 것도 손이 곱아드는 것도 
하냥 다 잊어버리고 달려가서 엄마 엄마 하고 사정없이 안길텐데 

눈은 그리움도 살아가면 사랑이나 매한가지라고 
여기 있으라고 한다 
차디찬 땅에서 잠들어 자고 있으면 얼어붙을까봐 
솜이불 깔아 놓아주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창밖이 온통 환하게 밝아오는 
온 천지 사방 천국같은 빛으로 반짝거릴테니 
잠시만 더 살라고 한다 
잘 살라고 한다 
아프지 말라고 

하늘에서 소리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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