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을 사모하면 / 전진호 시인

 

찢어진 틈새로 검은 안꼬 베여

운동화 철 퍼덕 거리는

지하철 계단이 있습니다

 

가을비가 끈적이며 흩어지는 어느 날

천사처럼 아름다운 한 소녀가

계단을 팔짝 이며 뛰어갑니다

 

낯선 소녀는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발견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사랑을 빈 바구니에 쏟아 놓고

계단을 뛰어 지하철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다음날도

다른 날에도

소녀는 계단을 내리다

빈 바구니에 뎅그렁 소리를 남겨 놓곤 했습니다

 

레일이 피곤을 호소할 즈음

소녀는 어느새 예쁜 아가씨가 되어

그 계단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지의 옷은 더 헤어져 살이 빼 곰 고개를 내밀었고

그 가운데 거지의 마음속에서는 소녀에 대한 그리움이

아가씨에 대한 조그마한 사랑으로 싹터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거지는

군데군데 꽃이 찢겨 나가고

잎새가 짓 이겨진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만치서 천사 같은 아가씨가

보조개가 패인 웃음 띈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아가씨가 거지 앞에 여느 때처럼 다시 섰고

이곳저곳 구멍 뚫린 플라스틱 바구니에 지폐가 놓여졌습니다

그날따라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던 거지가

꽃다발을 아가씨에게 건네주며

더듬거려 풀죽은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 했습니다

 

한편의 영화 같은 순간 속에 천사와 거지가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잠시뿐

거지가 네미는 장미꽃다발을 계단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아가씨는 거지를 동정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받아 줄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거지는 아가씨의 눈가에 스치는 악마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거지에게 진정한 사랑과 순결을 줄 수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거지에게 진정한 사랑과 순결을 줄 수 있는 천사도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달이 가면

플라스틱 바구니엔 어쩌다 지폐가 놓이고

코 묻은 동전도 가끔은 채워졌습니다

 

그렇게 나는

낯선 계단에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친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행복한 거지였습니다

 

사랑은 체념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터널인 것을

바구니 틈새로 사랑이 빠져나간 뒤

텅 빈 바구니만 다시 거지에게 남았습니다

 

오늘도 나는

바보 온달에게 사랑을 주었던

평강공주를 사모합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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