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수록(磻溪隨錄)’은 조선시대 실학파(實學派)의 선구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제도에 관한 고증(考證)을 적은 책으로, 26권 14책이다. 전제(田制)· 전제후록(田制後錄)·전제고설(田制考說)·전제후록고설(田制後錄考說)·교선(敎選)·교선고설(敎選考說)·임관(任官: 관직에 임명됨)·임관고설(任官考說)·녹제(綠制)·녹제고설(綠制考說)·병제(兵制)·병제후록고설(兵制後錄考說)·속편(續編) 등으로 나누었고, 부록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었다.
영조(英祖) 46년(1770)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이미(李瀰)에게 명하여 간행하였고, 뒤에 조시준(趙時俊)이 경상감사 때 속간했다.
조선시대 학자 유형원(1622~1673)은 검열(檢閱) 흠(欽)의 아들로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서울 출신이다. 1654년 진사시(進士試) 합격학고 학문 연구에만 전심했으며, 현종(顯宗) 6년(1665)과 이듬해 학행(學行)으로 각각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보냈다. 
실학을 학문으로서의 위치에 올려 놓았으며, 특히 토지개혁 등 전반적인 면의 혁신을 실시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영조(英祖) 46년(1770)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이 간행되고, 기타 많은 저서는 지금까지 목록(目錄)만이 전한다.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追贈)되었고, 부안의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祭享: 나라에서 올리는 제사)하였다 
물이름 “반(磻)”자인데, 반계는 위수(渭水)로 흘러들어가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강으로서 강태공(姜太公)이 낚시질하던 곳이다. 수록은 ‘붓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 수필(隨筆)과 같은 의미로 추측되며, 만필(漫筆), 만록(漫錄)이다. “마음에 느낀 그대로” 수감(隨感)이다.
조선 후반기에, 이학(理學: 성리학)과 예학(禮學: 예법에 관한 학문)으로 대표된 당시의 전통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가 있었다. 이것이 실학(實學)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선각적으로 일어난 근대의식 내지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적 자각을 배경으로 하여, 당시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에서 치우쳐 있던 성리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표방하며, 실생활의 이익을 목표로 정치·경제·문화·언어·지리·천문·금석 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광범위한 연구를 이룩하였다. 실학은 그 주장하는 내용과 시대를 아울러 고려하여, 첫째 이익(李瀷)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로서 토지세도 및 행정기구 등 제도상의 개혁을 주장하는 학파이다.
 둘째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인데,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등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이다. 셋째 김정희(金正喜)에 이르러 형성된 실사구시파 경서 및 금석(金石)·전고(典故: 전거(典據)가 되는 고사)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학파로 대별할 수 있다. 그리고 정약용(丁若鏞)을 이 3개 유파의 집대성자(集大成者)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전제(田制)는 밭을 관리하는 제도이다. 7세기 이후 공유주의(公有主義)의 반전(班田), 구분전(口分田)제, 음공전제(陰功田制), 8세기 말엽부터 15세기경까지는 영주(領主)사유주의 장원제(莊園制) 이후 1873년까지는 지행령제(知行領制) 및 지행령제 이후의 개인의 사유를 말한다.
  한국에 있어서도 고려 초기에 중국 당(唐)나라의 전제도(田制度)를 모방하여 처음에는 공전(公田)이었으나, 고려 말기에 가서는 공전이 붕괴되고 대토지 사유제(私有制)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공전(公田)은 정전법(井田法)서 지정된 논밭으로, 정부의 소유지이다. 은(殷)·주(周) 때에 실시한 정전법에서는 이등분된 정방형 토지의 중앙부분을 공전으로 정하고 그 수확한 것을 모두 조세로 바치게 하였다. 삼국시대 이후는 지방관에 대한 급부(給付: 재물을 공급, 교부함)로도 쓰이고, 균전법(均田法)에 있어서는 절호전(絶戶田)을 공전으로 불렀다.
  또한 북위(北魏)에서는 지방관에 대한 급전(給田)을 공전이라고도 하였는데, 당대(唐代)이후에는 주로 관전(官田)이라 하였다. 고려 이후에 공전이라고 한 것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토지에서 나오는 전조(田租)를 나라에서 받아 들인다는 뜻에서 전조는 개인이 받았던 사전(私田)과 대칭(對稱)되고 있었다.
  유형원이 살았던 조선 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 때에는 토지가 양반들에게만 과도히 사유화되면서 일반 민초인 농민들의 삶은 극심히 피폐(疲弊)해 졌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당파 싸움에 열중하여 정사와 민생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이렇게 관리들이 정파싸움에만 골몰하고 있는 중에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더욱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때 유형원은 일대 변혁과 개혁을 주장하여, 양반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토지를 농민들이 고루 소유하도록 하여 일정한 땅을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공전제를 주장했다. 또한 당쟁의 근원인 서원을 전면 폐지하고 공립학교를 운영하여 여기서 배출된 학자들을 관리로 등용하는 교육개혁을 제안했다. 서원과 과거제도를 통해 임용된 관리들이 민생을 외면하고 오직 당파의 이익만에 급급해 서로 싸우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를 타파하고 공정한 사회제도를 만들려고 노비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경작할 땅이 없는 농민들이 노비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사는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해야만 조선사회가 정상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기기 위해서는 불필요하고 불요불급의 관서와 궁궐의 축조를 대폭적으로 축소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러한 유형원의 개혁안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호응이 있었으나 기존의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쳐 중도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일이었다. 당시 조정이 실학을 기본으로 한 그의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형원 자신도 벼슬에 올라 자신의 철학과 뜻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후 이익·안정복·정약용이 계속 발전시켜 실학은 정조시대에 끝내 번영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저작권자 © 서울시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